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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팔레스타인의 디아스포라 나크바

by 호외요! 202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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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분쟁은 역사는 영토, 정체성, 종교, 지정학의 문제 등 꽤나 다면적으로 얽혀있고, 1편에서 유대인들의 이주와 팔레스타인지역으로 귀환하는 디아스포라와 시오니즘의 흐름을 살펴봤다.

2편에서는 오늘날의 끝없는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건국과 1차~4차에 이르는 중동전쟁,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와 비슷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추방되어 난민으로 떠도는 나크바 등에 대해 알아본다.

팔레스타인_난민기구
팔레스타인 난민기구(UNRWA) 운영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팔레스타인의 디아스포라 나크바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선언과 1차 중동전쟁, 1948~1949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초대 총리 데이비드 벤구리온이스라엘의 독립국가를 선언했고, 5월 15일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건국전쟁이라 부른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위임통치령 때부터 유지해 온 3만여 명의 민방위군으로 나섰지만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고, 팔레스타인 아랍 진영은 영국 위임통치령 시기를 거치며 전투경험이 있는 세대가 영국군의 진압으로 거의 해체된 상태로, 청년 무장 조직 만여 명이 전투에 참여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진영이 빠르게 무너지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원정군 등 아랍 연합군이 개입했지만, 요르단은 UN 분할안에 배정된 아랍 영토의 합병, 이집트는 요르단의 세력확장 견제, 시리아의 요르단 견제 등 각자 이해관계가 다른 아랍 연합군의 분열된 양상과 소극적인 전투로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을 포함 영토의 78%를 장악했고,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포함 서안지구를, 이집트는 가자기구를, 시리아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었다가 이스라엘이 인수한 골란 고원 20% 부분을 점령했다.

    팔레스타인_위임통치령1차_중동전쟁후_점령지역
    1920~1948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왼쪽지도), 1차 중동전쟁 후(오른쪽 지도), 좌측녹색 이집트점령, 우측녹색 요르단 점령

    Uishaki,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AnonMoo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팔레스타인인의 추방과 난민, 나크바


    대재난이란 뜻의 나크바(Nakba)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전쟁을 거치며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당하거나 이주하게 되어 난민으로 떠도는 상황을 말한다. 그 숫자는 약 70만 명으로 추산된다. 점령군에 의한 추방에 대해 아스라엘 정부는 부정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조장하고 묵인한 정황이 나오고 있다.

    요르단이 점령한 '서안 지구'나 이집트가 점령한 '가자지구'로  이주하지 않고 이스라엘 점령지역에 남아 있는 소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고향이 아닌 나자렛 등 일부지역에 한정되었고 계엄령 하에서 통행 등 모든 면을 통제받았다.

    좁은 가자지구에 몰려든 난민이 수십만이었고 숙소, 식량, 위생문제까지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에서 이스라엘 측으로 넘어오는 아랍인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생존과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으로 무장조직들이 생겨났고 보복과 그에 대한 보복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탄압받고 세계각지를 떠돌던 디아스포라를 이제 이스라엘에 의해 팔레스타인인들이 당하고 있다. 역사는 유사한 모습으로 돌고 있다.

    * 디아스포라: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살던 땅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관습과 규범을 유지하며 살아가는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말하며, 대표적으로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로 시작된 유대인의 이주를 말한다. 징용으로 이주한 한국인들과 대기근을 피해 이주한 아일랜드인 사례 등도 디아스포라에 해당된다.

    2차 중동전쟁, 1956.10. 29~11. 7


    쿠데타로 집권한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완댐 건설을 위한 비용 차관이 미국과 영국 등 서방에서 거절당하자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수에즈 운하의 지분은 영국이 44%, 나머지를 프랑스 주주들이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이라크와 알제리에서의 문제로 이집트에 반감이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공격할 명분이 생겼다.

    1차 중동전쟁 후에도 이집트의 호전적인 나세르 대통령의 등장을 염려하던 이스라엘도 영국과 프랑스의 계획에 뜻을 같이 했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삼국 외무장관이 셰브르에서 3자 회담을 가졌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이 일주일 만에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장악했다. 영국의 공수부대와 프랑스의 외인부대까지 가세한 상황으로 이집트가 위기에 처하자, 미국과 소련이 나서서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했다. 소련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이집트를 옹호하며 강경하게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했고, 미국 또한 구시대의 식민지화 의도가 느껴지는 구 유럽 열강을 강력한 재재와 무력시위를 선보이며 제재시켰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 강대국의 압박과 UN의 중재 속에 철군했고, 이스라엘도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세계의 패권이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차 중동전쟁 중에도 가자지구에서 유대인에 대한 테러가 있었고 이스라엘은 테러범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생존을 위한 공격과 보복, 생존을 위한 침입과 보복, 보복과 보복이 무한으로 이어진다.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1967.06.05~06.10


    전쟁시작 후 6일 만에 끝난 전쟁이라 6일 전쟁이라 부른다. 2차 중동전쟁 후 주변 아랍국가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더욱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티란 해협을 봉쇄할 거란 정보에 이스라엘 레비 에슈콜 총리는 이집트 선제타격을 감행했다.

    아랍 연맹에 의한 위기의식과 UN의 개입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는 이스라엘은 공군의 저공비행을 통한 기습공격으로 이집트의 항공기와 공군기지 등이 3시간 만에 80% 이상 파괴되었다. 속전속결로 지상군도 가자전선과 수에즈운하까지 단숨에 진격했다. 공군과 마친가지로 이집트 육군도 지리멸렬이었다.

    이스라엘의 기습에 공군전력 대부분을 잃었으면서도 이집트는 자신들이 이스라엘 공군의 대부분을 격추했고 육군도 이스라엘로 진격 중이라는 거짓 선전을 했고, 이에 요르단이 참전하여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 포격을 하며 참전했다. 하지만 멀쩡했던 이스라엘 공군의 역공에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가 함락되며 요르단은 후퇴했다.

    요르단의 참전 후 시리아와 이라크까지 참전했지만 결사항전의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공군전력을 초토화시키고 난공불락의 요새이던 골란 고원 전투까지 승리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점령했던 가자지구를 포함 시나이 반도까지, 요르단이 점령했던 동 예루살렘과 서안지구까지, 시라이가 지배하던 골란 고원 대부분을 점령했다.

    6월 10일, 전쟁시작 6일 만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아랍의 참전국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는 우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허술한 정보력, 지휘부의 무능함으로 이스라엘에게 압도적으로 패하였다.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중동의 여러 국가에서 분풀이로 아랍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이스라엘이 장악하게 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탄압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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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 1973. 10. 6~10. 25


    3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인정, 항구적인 평화협정, 비무장지대화'의 조건으로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반환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아랍 국가들은 거부했고, 다시 수에즈 운하를 중심으로 대치하는 국지전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1970년 나세르 대통령 사망 후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다트는 3차 중동전쟁의 대패를 교훈 삼아 군개혁과 더불어 많은 준비를 했고, 국지전으로 폐쇄된 수에즈 운하의 경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욤 키푸르'라 불리는 유대교 속죄일(휴일시기)을 기해 다발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이전과 달라진 시리아 군도 이스라엘 북부를 타격하며 기습에 성공했다.

    3차 중동전쟁때와 확연히 달라진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사력과 전술에 이스라엘은 전쟁 초반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무기 수급을 위해 유럽과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신없던 미국은 미온적이었고, 유럽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를 중지했다.

    소련은 냉전시대 미국의 움직임과 중국의 아랍 지지여부 등 복잡한 이해관계의 계산 속에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지원했고, 미국도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감을 인지하고 이스라엘에 대대적인 무기지원을 시작했다.

    강력한 무기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반격으로 전황을 뒤집었고 내친김에 이집트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려 했지만 더 이상 일이 커지는 것을 고려한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10월 25일 휴전이 이루어졌다.

     

    시오니즘은 인종주의, 유엔 총회 결의와 취소


    1975년 유엔 총회 결의 3379호

    1975.11.10 유엔 총회에서 "시오니즘은 인종주의, 인종차별의 한 형태다"라는 결의가 채택.
    찬성 72 / 반대 35 / 기권 32

    배경 :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과 1차 중동전쟁으로 1947년 UN이 제안했던 분할안 보다 더 많은 지역을 점령했고, 이후 UN의 계속되는 반환 결의안에도 따르지 않고 있다.

    결의안이 채택되자 차임 헤르조그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연설에서, "우리에게 있어서 증오, 거짓, 오만에 근거한 이 결의안은 도덕적, 법적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이것을 그렇게 취급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결의안을 반으로 찢고 퇴장했다.

     

    1991년 유엔총회 결의 46/86호

    1991.12.16 유엔 총회에서 1975년의 '유엔 총회 결의 3379호' 취소안 결의. 이 결의안은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제안했다. 찬성 111 / 반대 25 / 기권 13 / 부재 15


    디아스포라와 시오니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과 분쟁의 원인1

     

    디아스포라와 시오니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과 분쟁의 역사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복잡하고 뿌리 깊은 역사의 분쟁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다시 중동지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영토,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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