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관여된 4차례의 중동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중동 평화를 위한 각국의 중재는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건, 인류 보편적인 박애의 정신에서건 계속 있어왔다.
하지만 눈앞에서 이미 벌어진 유혈의 사태의 슬픔과 분노 속에 평화의 대의는 모두 사라지고, 저마다의 다른 이해관계로 선전되는 새로운 대의는 결국 탄압과 저항, 공격과 보복의 악순환으로 돌고 돈다.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인티파다와 오슬로 협정, 중동 평화 중재와 파탄의 악순환
중동 평화 분위기의 조짐
제네바 회의, 1973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의 주도하에 미국과 소련의 공동의장 하에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4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방문, 1977
오랜 전쟁 후 경제 상황 악화의 타개와 이스라엘에 빼앗긴 사나이 반도의 회수를 원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와, 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의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에 대한 연설을 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과 연설은 일대 사건이었고 파장이 컸다. 전쟁에 지친 이집트 국민들은 환영했지만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던 주변의 아랍 국가들은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며 분노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8.09.05~09.17
사다트의 이스라엘에 대한 평화 제스처를 계기로 미국 카터 대통령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하여 13일간 중동의 평화 협상에 대한 합의를 진행했다.
- 팔레스타인의 합법적 권리를 인정, 5년 이내에 완전한 자치권 보장
-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군 철수(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 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중동 평화에 대한 진전으로 사다트와 베긴은 19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유엔총회는 이 협정이 유엔과 PLO의 참여 없이 체결되었고, 팔레스타인 반환권, 자결권 등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평화에 대한 해결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협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1979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연정선에서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이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 1차 중동전쟁 이후 지속되어 온 전쟁 상태의 중단
- 이집트의 이스라엘 국가 인정
-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점령한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철수
- 수에즈 운하에 이스라엘 선박의 자유로운 통행
- 이집트에 의해 봉쇄되었던 티란 해협의 국제 수로 인정
- 이스라엘 점령지의 군사적 지배 중단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자치권 확립(이행되지 않음)
아랍권은 이집트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며 강력히 비난했고, 사다트는 아랍의 대의를 저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1981년 사다트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1차 인티파다 (intifada), 1987~1993
원인과 양상
인티파다는 봉기, 반란을 뜻하는 아랍어로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운동을 말한다. 1987년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이스라엘 방위군 트럭이 민간인 차량과 충돌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제와 탄압은 이어졌고, 고된 직종의 해결을 위해 팔레스타인인을 노동시장에 개방했지만 높은 실업률과 빈곤은 계속되었다. 점령지 내에 빠르게 늘어나는 유대인 정착촌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했다.
누적된 불안과 불만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왔고 검문소가 습격당했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시위가 번져나갔고 이스라엘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총파업, 납세 거부, 이스라엘 제품의 불매운동 등이 일어났고 시위는 가자와 서안지구 전체로 번져나가 1993년까지 지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의 후유증
강경진압의 여론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지는 아랍 청소년들을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돌을 던진 이들의 가족에게 무거운 벌금 고지, 세금 납부 거부자의 재산 몰수, 추방 등 무자비한 진압을 계속했다. 이스라엘의 강경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 6만여 명이 부상, 1600여 명 사망(17세 미만 270여 명), 1800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인 3000여 명 부상 200여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에 대한 강경진압이 계속되며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비난과 결의에도 이스라엘은 유엔의 조사를 거부했다.
Vince Musi / The White Hous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오슬로 협정 (1차, 2차), 1993~1995
길어지는 인티파다에 지친 이스라엘 여론으로 92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협상을 이어나갔다. 1993년 1차에 이어 1995년 2차까지 진해된 협정안이 달성되었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상호 국가 인정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후 자치권 이양
- 이스라엘군 점진적인 철수
- 서안지구를 3 구역으로 분리해 행정과 경찰권을 이행
오슬로 협정으로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199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에 여러모로 불리한 협정이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하마스는 PLO를 탈퇴하며 다른 팔레스타인 무장들과 함께 더욱 과격해진 독자행동을 펼쳐나갔다.
이스라엘 극우파에서도 협정에 대한 불만은 있었고 결국 1995년 2차 오슬로 협정 2달 만에 라빈 총리가 유대인 극우단체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협정의 세부 항목들의 이행은 계속되지 못했다.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립 선언, 1994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 1996, 아라파트 대통령(행정수반)
캠프 데이비스 정상회담, 2000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청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아라파트 위원장, 이스라엘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캠프데이비드에서 회담을 가졌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별 성과 없이 끝났다.
2차 인티파다 (intifada), 2000~2005
2차 인티파다의 원인
9월 28일 이스라엘 아리엘 샤론 야당 당수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동예루살렘의 성전산 성지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동예루살렘의 주권을 주장하자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오슬로 평화협정이 깨졌고 이스라엘은 다시 자치지구를 점령했다.
대대적인 시위의 확산으로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이스라엘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며 진압했고, 가자지구 골목에서 팔레스타인 소년 무함마드 알두라가 아버지 뒤에 숨어있다 총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이 사망했고 성난 시위대는 라말라에 진입한 이스라엘 예비군 2명을 살해했고 이 장면을 이탈리아 방송이 전 세계로 송출했다.
이스라엘 청소년들이 무장 단체에 납치되어 살해당하고 이스라엘 경찰과 방위군의 강경 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하고, 폭력과 보복의 끔찍한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급증하는 자살 폭탄 테러
2001년 5월 네타냐 쇼핑몰에서 하마스 소행의 자살 폭탄 테러 발생 후, 이스라엘은 1967년 이후 처음으로 전투기를 동원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공격했고, 그 후로도 기차역. 버스 등 자살 폭탄 테러는 계속 이어졌다.
2001년 6월 텔아비브 디스코텍 앞에서 자살 폭탄 테러 발생으로 이스라엘인 21명이 사망했고 테러범 사에드 호타리는 하마스와 연결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3월 유월절 행사, 네타냐 파크 호텔의 자살 폭탄 테러로 1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방패방어작전'을 감행해 하마스의 테러 기획자들을 체포, 사살하고 불도저를 이용해 군사작전을 이유로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이 사망했다.
2차 인티파다의 후유증
비무장 시위와 파업 등이 주를 이뤘던 1차 인티파다에 비해 2차 인티파다는 민간인 대상 자살 폭탄 테러와 카삼 로켓, 박격포의 공격이 급증하였고,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팔레스타인해방 인민전선(PFLP), 알아크샤 순교자여단 등 무장단체들의 게릴라 전술이 대두되며 민간인 피해를 불러와 국제 테러 단체로 지명되었다.
이스라엘 또한 봉쇄, 통행금지, 절차 없는 수색과 구금, 안보를 이유로 무자비한 탄압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를 야기해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다. 2차 인티파다 시작 후 2008년까지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4800여 명이었고, 이스라엘인 사망자는 1000여 명이었다.
* 2004년 야세르 아라파트 지병으로 사망.
샤름 엘 셰이크 정상회담, 휴전. 2005
2005년 시나이반도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이스라엘 샤론 총리와 팔레스타인 무하마드 압바스 대통령이 서로에 대한 폭력행위의 중지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철수를 약속하며 2차 인티파다는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사이가 틀어진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는 휴전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하지만 이 휴전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내부의 온건파와 강경파에 따라 온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대응은 변함이 없었고, 점점 유대인 정착촌이 늘어나며 생존을 위협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도 팔레스타인 내 온건파의 존재에도 강경파의 대응을 뒤집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부패와 정치적 욕망 속에 가자지구의 충돌 강도는 점점 높아져만 가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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