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가구, 타이포 그래피와 제품디자인 등등 근현대 디자인분야에 커다란 영향력과 발자취를 남겼던 독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BAUHAUS).
20세기초의 미술사나 건축사, 모더니즘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 등장해야만 하는 바우하우스의 탄생과 기본 이념, 그 영향력등을 살펴본다.
Spyrosdrakopoulos,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바우하우스의 역사, 기본 이념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운영된 독일의 예술과 디자인 학교였다. 독일 바이마르(Weimar)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설립되었고, 특히 건축, 산업 디자인, 시각 예술 분야에서 디자인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법으로 알려져 있다.
바우하우스 철학의 핵심은 예술과 디자인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대량생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예술과 산업을 통합하고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새로운 미학을 담은 제품들이, 대량생산을 통해 전체 사회에 널리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은 독일공작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공작연맹은 1907년 뮌헨에서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단체로 독일의 미술, 예술, 공업 분야의 인물들이 전통적인 수공예 공업 대신 대량생산의 공예산업 추진과 활성화를 위해서 결성되었다.
위와 같은 독일 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기존의 그랜드 듀칼 색슨 예술 아카데미와 그랜드 듀칼 색슨 공예학교를 합병하고 책임자인 초대 교장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맡게 되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 지향성
바우하우스는 공작 교육과 형태 교육 두 가지 유형의 교육을 제공하는 예술, 디자인 및 건축 학교였다.
공작 교육은 석재, 목재 및 금속 등의 재료를 다루는 기능적인 교육이었고, 형태 교육은 재료의 분석, 구성 및 표현에 중점을 둔 이론 교육이었다. 두 가지 유형의 교육을 병행하여 실제 교육과 이론 교육을 제공하였다.
1919년 스위스 화가 요하네스 잇텐, 독일계 미국인 화가 라이오넬 파이닝어, 독일 조각가 게르하르트 마르크스와 함께 바우하우스의 교수진을 구성하여 실습에 들어가기 전 6개월의 예비학습과정을 거치게 했다
목공, 금속공, 도예,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직조, 그래픽, 인쇄, 무대연출을 다루는 실습장에서는 이론을 강조하는 예술가와 전문가가 수업을 진행했고 3년에 걸친 실습교육 후 학생들은 전문직공 자격증을 받았다.
1920년에는 독일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인 오스카 슐레머가 연극 워크숍을 이끌었고, 1922년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가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러시아 구성주의 화가이자 건축가 엘 리시츠키가 바우하우스를 방문했다.
바우하우스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와 원색의 사용이었다. 직선, 직각, 그리고 단순한 모양을 선호했고,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운동에서 인기 있는 장식적인 요소들을 배제했다.
바우하우스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학제 간 협업에 대한 강조였다. 이 학교는 서로에게 배우기 위해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장인들을 모았다. 이 협력적인 접근법은 새로운 기술과 재료의 개발과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디자인의 창조로 이어졌다.
바우하우스는 또한 교육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법으로 알려져 있다. 실습과 실제 경험을 강조했고, 학생들은 다양한 재료와 기술을 실험하고 탐구하도록 장려되었다. 교육 과정은 학생들이 경험이 풍부한 예술가와 장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일련의 워크샵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25년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이전하였고 이때 지어진 건물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하였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사임하고 하네스 마이어가 교장직에 올랐으나 데사우 시장과의 갈등으로 1930년 해임되며 미스 반 데르 로에(Mies van der Rohe)가 그로피우스의 추천으로 교장직을 이어갔다.
독일의 나치당은 모더니즘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고, 1932년 나치는 데사우시를 압박하여 바우하우스를 폐쇄시켰고 미스 반 데르 로에는 1932년 개인비용으로 베를린에 바우하우스 사립학교를 설립했으나 다시 게슈타포의 압력으로 바우하우스는 문을 닫았고, 미스 반 데르 로에는 1937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Kai 'Oswald' Seidler from Berlin, Germany,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바우하우스의 영향
바우하우스에서 강의를 했던 여러 분야의 예술가, 전문가들, 또 바우하우스에서 수업을 받았고 활동을 이어갔던 예술가, 전문가들, 이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바우하우스의 미학과 철학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발터 그로피우스와 마르셀 브로이어는 하버드 디자인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미스 반 데르 로에는 시카고에 정착하여 필립 존슨의 후원을 받으며 미국 현대 건축의 기초를 다졌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예술적 영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헝가리 출생의 화가이자 사진가인 모홀리 나기(Moholy-Nagy)는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했고 이는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디자인연구소의 전신이 되었다.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던 화가이자 판화가인 베르너 드루즈(Werner Drewes)는 미국으로 이민후, 미국 내에서 바우하우스 학파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며 미국 추상화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바우하우스가 디자인 교육에 끼친 영향도 컸다. 바우하우스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예술, 공예, 기술을 통합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접근은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에 통합되었고, 바우하우스 예비과정에서 이론과 응용을 통합하는 실용적인 접근법은 많은 국가에서 건축 및 디자인 학교의 공통적인 특징이 되었다.
또 현대 가구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한 마트 스탬의 캔틸레버 의자와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도 빼놓을 수 없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서 1933까지 운영된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 영향은 상당했다. 바우하우스는 현대 미술과 디자인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건축과 가구에서부터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그 유산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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