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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토픽

드레퓌스 사건, 과잉의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시오니즘의 탄생

by 호외요! 202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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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은 과잉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정서에 반유대주의가 더해져 한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처참히 침탈한 최악의 사건이다. 

정치적 이득에 함몰된 극우의 군부와 종교, 언론의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행태는 개인의 희생뿐 아니라 사회의 건전성을 무너트리는데 앞장섰다.

강등_당하는_드레퓌스
강등 당하는 드레퓌스, 앙리 마이어, 1895

 

드레퓌스 사건, 과잉의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시오니즘의 탄생

     

    드레퓌스 사건의 시대적 배경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71)에서 패배한 프랑스 내에서 애국주의와 반독일 감정이 나날이 높아져갔고, 전 유럽에는 민족주의로 인해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1894년 9월, 프랑스 정보국 요원이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빼내온 정보유출 편지를 통해 프랑스군 내부에 독일로 군사기밀을 유출시키는 간첩행위자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사가 진행되며 편지의 필적이 참모본부의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고, 편지 내용에 나오는 암호명 'D'가 드레퓌스의 이름 첫 글자와 같다는 이유로 드레퓌스는 범인으로 지목받았다.

    드레퓌스는 독일계 유대인이었고, 1894년 12월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로 종신형과 군적 박탈을 선고받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팽배한 반독일 정서와 반유대인 정서에 묻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불명예 전역 후 1895년 2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했다.

    악마섬에_수감된_드레퓌스
    악마섬에 수감된 드레퓌스, 1898

     

     


    드레퓌스 사건


    사건의 전말

    1896년 3월,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다른 간첩 사건을 조사하던 중 진범은 드레퓌스가 아니라 페르디난드 에스터하지라는 것을 밝혀내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자신들의 실수를 은폐하려는 군의 고위 관료들에 의해 에스터하지는 무죄로 풀려나게 되었다.


    에스터하지의 석방 후 반드레퓌스파와 드레퓌스의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시위, 폭동, 테러, 폭력사태, 유혈충돌이 빈번했다.

    에스터하지는 위험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고 후에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했다.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에스터하지가 무죄로 풀려나자 분노한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는 신문 로로르 (L'Aurore )에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했고,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졸라는 이 글을 통해 대통령 펠릭스 포르를 거론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 재판의 사법적 오류와 증거부족을 지적하며 군부와 군부에 의한 드레퓌스의 부당한 구속수감을 비난하였다.

    작가 에밀 졸라의 글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드레퓌사르(Dreyfusard)와 반드레퓌스파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군 고위층으로부터 소송을 당해 재판정에 오르기까지 했다.

    에밀 졸라는 결국 징역과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반드레퓌스파의 거센 공격 속에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 후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모욕_당하는_에밀_졸라
    모욕 당하는 에밀 졸라, 1898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의 수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프랑스 군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전 세계 언론들도 이에 동조하자 프랑스 정부는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1898년 8월, 진범인 에스테하지와 함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감방에서 자살을 하며 1899년 6월 고등법원이 재심을 진행할 것을 결정했고, 드레퓌스는 유배지인 악마섬을 떠날 수 있었다.

    1899년 드레퓌스는 재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사면에 의해 석방되었고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4년에 다시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드레퓌스는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되어 군에 복직했다.

    그 후 드레퓌스는 소령으로 승진하였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고 퇴역했으나,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참전한 후 1935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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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카톨릭 교회의 선동과 공격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동으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카톨릭교회는 카톨릭 계열 신문들을 통해 '유대인의 매점매석, 신을 살해한 민족, 저주받은 민족' 등을 외치며 반유대주의 선동에 앞장섰다.

    "대역죄, 유대인 장교 체포"라는 제목으로 드레퓌스의 체포 사실을 맨 처음 특종으로 보도한 신문도 카톨릭 계열의 <라 리브르 파롤>이었고, 이 보도를 시작으로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국수주의와 결합하며 프랑스는 극도의 갈등과 분열 양상에 빠지게 된다.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 일부 신문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하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기독교와 대부분의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을 극렬하게 부추겼다.

     

    카톨릭 계열 신문 <라 리브르 파롤>은 에스터하지와 함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자살하자, 중령이 유대인에 의해 희생된 순교자라며 모금을 주도했고, 예수회 교단은 이 모금 운동에 기부금을 내지 않은 학생을 퇴학시키기까지 했다.

    종교계와 결합한 프랑스 극우파들은 드레퓌스의 무죄선고 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유대주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시오니즘의 태동

    드레퓌스가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사르(Dreyfusard)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이 사건은 드레퓌스의 삶뿐만 아니라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일상에도 너무나도 큰 상처와 악영향을 끼쳤다. 가족들 간의 식사시간에 드레퓌스의 얘기가 나오면 난장판이 되어 써로 싸우는 당시의 만평만 봐도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편견, 악의를 가진 마타도어, 정치와 종교의 이해적 결합, 거기에 합류한 무책임한 언론의 해악까지 더해져, 드레퓌스 사건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가장한 최악의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방위적인 압박과 사회적 경멸의 분위기 속에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면서,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운동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 바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 운동의 태동이다.

    드레퓌스_사건의_만평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가족끼리도 나뉘어 싸운다는 내용의 만평, 카란 다쉬, 1898


    드레퓌스 사건의 영향

    드레퓌스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이득에 함몰된 극우의 군부와 종교, 언론의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행태는 개인의 희생뿐 아니라 사회의 건전성을 무너트리는데 앞장섰다.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 여파는 프랑스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대중 토론과 논쟁을 거쳐 이민, 종교의 자유, 소수자 권리 등의 법안이 마련되었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위한 정교분리원칙, ‘라이시테(laicite, 비종교성)' 원칙을 확립하였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과 종교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증오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추가적인 자원을 제공하는 등의 법안이 다수 발의되었다.

    이전보다 진일보하였지만, 사실 이러한 반지성적인 행태는 분명한 역사적 교훈이 존재함에도, 오늘날에도 일부 위정자와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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